자는 아이들을 깨우지 마라
성열관 (경희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오늘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실에서 과연 몇 명이나 잤을까? 오전인가 오후인가, 어떤 교과 수업인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자는 문제는 교사들에게 매우 큰 고충거리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중대한 이슈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자는 현상은 보통 ‘참여’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OECD에서는 학생의 참여(engagement)를 두 가지 지표에 의해서 산출한다. 그런데 아주 흥미롭게도 한국 학생들은 매우 상반된 지표를 보여주고 있다. OECD는 학생의 참여 정도를 소속감(sense of belonging)과 출석(attendance) 정도로 알아본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은 OECD 국가 중에서 매우 ‘낮은’ 소속감과 동시에 매우 ‘높은’ 출석률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하면 한국에서는 다행히(?)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만, 정작 학교에 와서는 자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실에서 많은 학생들이 자는 현상은 유럽이나 북미의 참여 거부 징표와는 차이가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이 현상에 대한 보다 한국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들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후반부터 ‘교실붕괴’ 현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논리는 크게 보아 세대충돌론과 시대충돌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세대충돌론은 서로 다른 세대인 교사와 학생이 세대간 입장 차이로 충돌하고, 성인세대의 전통적 사회화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자는 행위로 저항한다는 입장이다. 즉 교사와 학생은 성인세대(성인이 된 세대)와 성장세대(성장하고 있는 세대)로 구분되는데, 학생에 대한 성인의 역할기대와 학생 자체의 인간적 욕구가 충돌하는 경우, 우리는 이것을 세대충돌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대충돌론은 학교와 교사의 계몽주의적 태도가 근대적 방식의 훈육과 표준화를 통해 청소년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탈근대 또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이 학교의 전통적 규범과 충돌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교실붕괴는 실추된 교권을 회복해야 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학교가 학생 중심으로 재구조화되어야 됨을 알려주는 패러다임 전환의 신호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관점은 사회변동에 따른 학생들의 참여거부 현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세대간 충돌이나 시대간 충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수업 자체에 대한 비판의식을 흐릴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자는 학생들’과 같은 참여거부의 문제는 세대 또는 시대 충돌로만 환원되어서는 안 되며 수업 자체가 과연 교육적인가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규명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필자는 최근 한 중학교를 대상으로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들을 인터뷰해본 적이 있다.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들’은 협의의 개념으로 볼 때, 문자 그대로 수업참여 의욕이 낮아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거나 팔을 괴고 잠을 청하는 학생들로 볼 수 있다. 한편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들은 이보다 훨씬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소위 ‘대놓고 자는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수업참여를 거부하는 학생들이며, 교사의 책망을 피하는 수준에서 딴청을 피우는 학생들은 일종의 ‘타협 행위’라 볼 수 있다. 수업시간에 자는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많은 학생들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필자가 인터뷰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자는 양태는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① 대놓고 자는 학생들: 수업질서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수업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교사와 암묵적으로 타협(“방해 안 할 테니 건드리지 말라”)하고, 그 타협 행위로서 엎드려 자는 학생들.
② 눈감고 있는 학생들: 겉으로는 잠든 것 같지만 귀는 열려있으며, 수업시간의 지루함을 견디고 신체를 이완시키는 방편으로 턱을 괴고 있는 등 느슨하게 자는 학생들.
③ 눈뜨고 자는 학생들: 대놓고 잘 배짱이 없으면서도 수업에 참여할 의사도 없어, 눈은 뜨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딴 생각을 가득 채우는 학생들.
대놓고 자는 학생들은 적극적 참여기피 유형으로 볼 수 있으며, 눈감고 있거나 눈뜨고 자는 학생들은 소극적 참여기피로 볼 수 있다. 학교에서 소외되는 많은 학생들은 일찍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난도의 교육과정으로부터 배제되기 시작하여, 그 후로 계속되는 입시 위주의 학교를 그만둘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교실에서 앉아있어야 하는 ‘예외적 상황’에 놓인다. 이 학생들은 교육활동으로부터 ‘배제된 채, 그런데 여전히 포함된’ 학생들이다. 학교의 성공 시스템에서 그 수혜 대상으로부터 배제되었으나 여전히 교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한 학교에 포함되어 있는 학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영역에 놓여있다. 이중적 피해자이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참여를 기피하는 것은 학교에서 제도적으로 성공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학교에서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축구경기라 할지라도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퇴장해서는 안 되는 윤리와 비슷하게, 학생들은 학교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학교는 반드시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안 다닐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으며, 동시에 학교에서의 제도적 성공 시스템에 적응할 자신도 없었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적 점이지대(이번 게임을 놓치고 다음 게임을 기다리는)에 놓인 학생들은 ‘슬슬이라도 뛰는 척 하다가 시간만 흘려보내는 식’의 축구경기를 하듯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자는 학생들이 학교에 대한 기대가 낮은 것은 제도적 성취와 관련된 참여 동기가 낮은 것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학교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의 불평등이 그대로 잔존하는 한 학생들은 학교에 거는 기대가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는 아이들 현상은 교육이 그 자체만으로 스스로 개선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여전히 학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는 아이들이 현저히 줄어들 수는 있다. 수업참여기피 현상을 보이고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들이 느끼기에 지루한 수업 시간 중에 주로 멍하니 있으면서 딴 짓을 하거나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부분적으로나마 참여를 하는 수업도 있다. 이 아이들은 강의식 설명 위주로 진행하는 수업이나 난도가 높고 진도가 빠른 수업에는 대부분 수업참여기피 현상을 보인다. 하지만 모둠별 토론수업이나 실험·실습이 진행되는 수업에는 일정 부분 참여 양상을 보인다.
정리하면, 수업시간에 자는 중학생들은 ① 수업의 지루함을 버티고자 자는 전략을 취하고, ② 학교에서 성공적으로 학업을 수행할 필요를 거의 못 느끼며, ③ 그 결과 인지적 수고를 기꺼이 투여하려는 의사가 없는 학생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는 학생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① 협력과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수업전략을 활용하여,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② 모든 학생이 각자 잘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경험 자체를 다양화해야 한다. 그러면 ③ 점진적이나마 수업에서 주어진 과제에 참여하게 되고, 정서적으로도 수업에의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을 깨우지 마라’라고 말하고 싶다. 혼을 내거나 억지로 깨워봤자 교사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일제식, 획일식 수업에서 그 아이가 눈만 뜨고 있어 봤자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억압에 순종적인 피동적 주체만 형성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사가 진정으로 아이들을 깨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오래된 ‘나쁜’ 질서의 변경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치가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수업의 혁신이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수업의 혁신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오늘날 그 유용성이 검증된 방식은 협력수업이다. 협력수업 그 자체의 유용성과 바람직성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다 적을 공간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협력수업의 기법이 아니라 협력수업이 추구하는 가치에 있다. 그 가치(한 아이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에 대한 모두의 동의를 획득한 질서를 세우는 것, 바로 이것이 예외상태를 벗어나는 교육학적 방식이다. 민주화된 국가가 계엄령 시기의 망명자를 귀환시킬 수 있는 것처럼 오직 정상화된 수업의 질서만이 자는 아이들을 깨울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교실 질서의 교육적 회복만이 학교에서 ‘자는 아이들을 깨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자는 아이들을 깨우지 마라. 정 깨우고 싶다면, 협력수업을 하라.



